- 주일 성경 공부 (8.30.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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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을 분별하라 – 안점식
1. 현세주의적 물질주의
(1) 풍요와 다산
바알신앙의 특징은 ‘풍요’와 ‘다산’이라고 하는 현세주의적 물질주의 축복관에 있다. 풍요와 다산은 현대의 물질주의에서 ‘돈’과 ‘성’의 결합으로 나타난다. ‘풍요로운’ 삶을 자극하는 현대 물질주의의 선구자인 광고는 섹스어필(sex appeal)의 기법을 통해서 더욱 큰 효과를 얻는다.
(2) 죄 문제를 다루지 않음
바알신앙은 풍요와 다산의 축복만을 말하고 죄를 지적하지 않는다. 바알신앙에서 현세적 기복주의와 신비주의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이 둘의 공통점은 ‘죄’의 문제보다는 ‘고통’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서 쾌락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극소화하는 것을 추구한다는 데 있다.
오늘날 교회에 침투한 바알신앙, 즉 물질주의는 심각하다. 교회가 죄를 지적하지 않고 현세적 축복만을 말함으로써 성도들은 진정한 구원의 감격을 누리지 못한다. 교회에서는 죄를 말하지 않고 자신은 죄를 자복하지 않았는데도 축복을 약속받으면 귀는 즐거울지 모르지만 자신의 영혼은 여전히 죄책감에 눌려 참된 기쁨을 회복하지 못하게 된다. 교회가 책망만 하거나 위로와 축복만을 말하는 것은 모두 양극단의 인본주의적 태도이다.
2. 기계적 관계, 기계적 신앙
(1) 자동판매기 신앙
바알신앙의 특징은 기복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기복신앙에 무의식적으로 전제되어 있는 것은 기계적 관계이다. 기계적 신앙이란 자신의 영적, 도덕적 상태와는 상관없이, 많은 기도, 많은 헌금, 많은 헌신 등을 “투입(input)”했을 때 그에 상응하는 세상적 복을 기계적으로 “산출(output)”해 낼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이다.
이와 같은 자판기 신앙이 교회 안에 팽배하다. 이것은 자신이 하나님께 선심을 쓰거나 많은 투자를 하고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상업적 신앙태도이다. 하지만 이 모든 열심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관계하지 않는다면 무당의 치성(致誠, Devotion)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신앙 생활에 열심을 내어야 한다. 하지만 여호와 신앙의 열심은 받아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받았기 때문에 내는 열심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는 것이 특권이고 은혜이다. 바알 신앙은 무엇을 받기 위해서 두려워서 헌신하지만 여호와 신앙은 이미 모두 받았기 때문에 감격함으로 헌신한다. 치성의 논리는 ‘주고 받기’(give & take)의 논리이다. 반면에 여호와 신앙의 특징은 주고받기가 아니라 ‘ 은혜’ 이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품꾼의 비유로 잘 보여주고 있다. 일한 양과는 상관없이 모든 품꾼에게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씩 준 포도원 주인은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을 묘사한 것이다. 그 분은 불공평한 분이 아니시라 은혜로운 분이시다. 그러나 바알신앙인은 투입량이 다른데 산출량이 동일한 것을 견딜 수 없어서 하나님을 불공평하다고 판단하며 그 분에게 불만을 가질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은혜가 무엇인지 아는 여호와 신앙인은 진정한 정의와 공의가 무엇인지 옳게 분별한다.
(2) 현세적 복을 받는 올바른 순서
여호와 신앙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고 결과는 현세적 축복이다. 그러나 바알 신앙의 목적은 현세적 축복이고 결과가 하나님의 영광이다. 성경은 “죄인과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잠23:17)고 말씀한다. 불신자의 현세 축복을 보고 당황하거나 부러워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면 하나님은 관여치 않으시고 내버려 두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악인은 자신의 정욕적 열심이나 마귀의 도움으로 형통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의 순서가 잘못되었을 때 하나님은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바로잡으실 때까지 끈질기게 관여하실 것이다.
여호와 신앙의 목적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마6:33)것이다. 그 결과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시기 전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31-32). 바알신앙의 목적은 언제나 물질 추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분의 자녀의 순서를 바르게 바로잡기를 원하신다.
(3) 예수님의 광야 시험과 바알신앙의 유혹
예수님께서 욕심도 죄도 없으시지만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것은 여호와 신앙을 가지기 위한 모든 사람이 반드시 겪어야 할 시험과 훈련의 내용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마귀는 예수님께 바알신앙을 유혹 하였다.
a. 떡의 시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눅 4:3)
b. 권력욕과 명예욕의 시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 것을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눅 4:6-7)
c.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시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눅4:10)
(4) 여호와 신앙에서의 복
바알신앙의 복이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이라면 여호와 신앙에 있어서 복은 영적, 도덕적 상태, 즉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구약의 시편에서 복있는 사람의 예들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시1:1-2) “여호와를 의지하는자” (시2:12)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시32:1)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시 84:5) “주의 징벌을 당하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시94:12)이다.
신약의 산상수훈에서 복있는 사람들의 예도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마 5:3-10)이다.
이처럼 여호와 신앙에서는 복은 사람의 올바른 영적, 도덕적 상태이며 그 사람의 하나님과 올바른 맺는 것이다. 우리가 영적, 도덕적으로 올바르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을 때는 우리가 애쓰지 않아도 우리의 말과 행위와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사단이 유혹하는 바알신앙은 사람이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고 기계적인 신앙생활을 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갖지 못하게 하여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성숙하는 것을 막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지 못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