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일 성경 공부 (7.26.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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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을 분별하라 – 안점식]
안점식: 1962년 부산 출생. 서울대 철학과 졸업 동 대학원 동양철학 전공. 대학시절 동서양의 철학, 종교 사상 탐구 중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참된 안식 얻음. 한국선교훈련원과 합동신학대학원을 졸업. 미국 트리니티 신학교(TEDS) 선교학 철학박사. 현 합동신학대학원 선교학 교수. 2녀 1남 홈스쿨링으로 자녀 양육 중. 저서 [세계관과 영적전쟁], [세계관을 분별하라], [기,무엇이 문제인가], [세계관 종교 문화]가 있음.
머리말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타종교와 세계관의 도전에 노출되어 있다. 더군다나 종교 다원주의(多元主義, Pluralism) 시대에는 세계관의 도전을 피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이 세계관의 도전에 직면하여 갈등을 겪고 있을 뿐 아니라 ‘골방의 불가지론자(不可知論. agnosticism)’가 되거나 ‘무언가 석연치 않은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의심의 짐’을 지고 있다. 오늘날 교회학교에서 교육을 잘 받은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가서 갈등하고 신앙을 잃어버리는 것은 세계관의 도전에 직면하는 훈련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불신앙적 의심’과 ‘진지한 의문’을 구분하지 못한다. 진지한 의문은 결코 불신앙이 아니며 올바른 신앙적 태도이다. 진지한 의문을 할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말씀의 완전하심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성경적 세계관과 비성경적 세계관은 ‘여호와 신앙’과 ‘바알 신앙’의 차이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을 섬기다가 징계를 받고 하나님께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바알을 섬기는 모습을 본다. 이런 어리석은 모습이 오늘날 여전히 재현된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왕상18:21). 영적 대결은 곧 세계관 대결이다(world view encounter).
1부 여호와냐 바알이냐
세계관이란 단순히 ‘세상을 보는 창’이라 할 수 있다. 세계관은 공부를 통해서 이론적으로 학습되기 보다는 어릴 때부터 경험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다. 즉, 많이 배운 사람이나 적게 배운 사람이나 모두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세계관대로 살아간다.
세계관은 문화에 매우 밀착되어 있다. 우리 나라 문화에는 유교적이고 무속적인 세계관이 깊이 깔려 있는데 두 세계관의 공통적인 특징은 현세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현세기복적 세계관에서는 복의 개념이 전통적인 중국의 복 관념처럼 복, 녹, 수이다. 복(福)이란 재물이 많은 것을 의미하고, 녹(祿)은 높은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며, 수(壽)는 오랫동안 무병장수하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이성을 진리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이성은 경험한 것을 합리화시켜서 하나의 틀(frame)을 만들고, 이 틀 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다른 말로 하면 ‘편견’이고 ‘고집’이다. 이러한 속성은 하나님 말씀에 적용될 때에도 동일한 현상이 일어난다. 하나님 말씀은 초자연적이고 초이성적인 사실들을 포함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자신의 경험에 고착된 이성의 기존 틀에 합리화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즉, 자신의 세계관이 가지고 있는 폐쇄성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완강하게 거부한다. 그것이 바로 ‘강퍅(stubborn, stiff-necked)’이다.
따라서 왜곡된 이성의 틀이 덜 확립된 어린이들은 어른들보다 훨씬 더 복음을 잘 받아들인다. 반대로 나이를 먹을수록 복음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진다. 이렇게 강퍅하고 고집스러운 인간들도 살아가다 보면 자기의 물질주의적 세계관이 붕괴되는 큰 어려운 사건들을 경험하게 된다. 이때야 말로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여기서 기존의 세계관에 균열을 일으키시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회심하게 하는 모든 과정에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하심이 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회심케 하는데 있어서 주체는 언제나 하나님이시다.
전도를 할 때 어떤 사람을 인간적인 지혜로 설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무리 무식한 사람이라도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식적으로 전도하려고 하면 더 어려워진다. 논리적으로 상대를 굴복시킬 수는 있지만 그 영혼을 얻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세계관이 바뀌기 위해서는 다른 차원의 경험이 필요하다.
바울은 당시 헬라 말과 철학에 능통했고, 유대 말과 유대 신학에 정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오직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고전 2:2)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사람의 거듭남이 ‘설득력 있는 사람의 지혜의 말(excellence of speech or of wisdom)’로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성령의 나타남(demonstration)과 능력’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바울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선교사들이 현지인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을 변화시키지못하고 가치체계나 행동양식만 변화시키는 일이 종종 있다. 겉모습만 기독교식으로 변화되는 것은 알맹이는 안 바뀐 ‘명목적 신자’이다. 그러나 그 사람의 본질은 다급할 때 나타나게 되어있다. 고난이 닥치고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사람의 믿음이 충성스러운 것인지 드러난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부자 청년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의 본질이 드러나도록 극한상황으로 몰고 가셨다. 청년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질문했다(막 10:17). 예수님께서는 어려 계명들을 말씀해주셨다. 청년은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응답했다. 그의 행동양식은 그를 완벽한 신자처럼 보이게 했다. 예수님께서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의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물질주의적 세계관을 드러내시기 위해 극한상황의 질문을 하신 것이다. 청년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핀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갔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물질주의 세계관과 혼합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사실이다. 겉으로는 교회에 잘 나오고 가치체계나 행동양식을 다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 깊숙한 곳에 뿌리 박혀 있는 세계관은 ‘대중가요’ ‘스포츠’ ‘전자제품’ ‘자동차’ ‘집 크기’와 같은 용어로 대변되는 물질주의이며, 이러한 것들이 그들의 사고방식과 삶의 양식을 주도한다. 성경적 세계관이 삶에 많이 녹아서 행동과 판단의 원리로 더 많이 작용할 때 우리는 그를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 있다. 교회도 결정 내리는 판단들이 보다 성경적 원리에 근거하고 있을 때 성숙한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성숙한 사회도 마찮가지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서 아는 것은 많은데 가슴에 와닿지 않아서 답답해 한다. 지식으로는 알고 머리로는 동의하는데 무엇인가 모르게 만족함이 없다. 이러한 이유는 성경적 세계관이 아닌 자신의 세계관대로 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잘못된 것을 파함과 동시에 반드시 올바른 성경적 세계관을 세워야 한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고후 10:5-6)하는 것이 곧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이다.
예수님의 지상명령(마 28장)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은 하나님 말씀, 즉 성경적 세계관을 나타낸다. 제자를 삼는 것은 반드시 성경적 세계관을 ‘가르치고’ ‘지키게’ 해야하는 것이다. 반드시 그 말씀을 순종하여 지키게 해서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고 말씀에 능력이 있다는 것을 체험케 해야 한다. 가슴에 와닿지 않는 사람들은 말씀에 순종해서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체험이 없어서 답답한 것이다.
성숙한 신앙을 방해하는 고질적 요인은 ‘상처’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이러한 ‘상처’들은 자신의 성숙 만을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관계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켜서 공동체의 올바른 성장을 방해한다. 오늘날 교회에서 소위 ‘상처’를 치유하는 예배는 힌두교나 불교 등의 동양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자아’에 지나친 비중을 두는 인간중심적 방식이라 문제가 많다. 오히려 예배와 기도와 찬송은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관심을 집중하게 함으로써 그 결과 자연적인 치유가 일어나게 된다.
타락 후 사람은 세상을 왜곡되게 이해하고 자신만의 잘못된 세상의 지도를 그리고 그것이 진짜 지도라고 믿는다. 성경적 세계관이 온전한 지도라면 거듭난 사람이라도 완전한 지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다. 죽는 순간까지 지도의 잘못된 부분을 원본에 맞추어 고쳐 나가야 한다. 복음을 들으며 지도를 계속 수정해 나가는 작업은 사람에게 고통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단한 ‘자기부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완악’한 상태는 자신의 지도가 완벽하다고 착각하면서 수정작업을 멈춘 것을 말한다. 마치 자기가 온전한 지도를 가진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나 다른 사람의 충고에 대해서 전혀 마음을 열지 않고 잘못된 자기확신 가운데 고집을 피우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고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으로 인해서 실족하게 된다. 반면에 언제나 원본 지도를 갖다 대었을 때 잘못이 드러나면 기꺼이 수정하는 사람을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쓴 뿌리’ ‘상처’의 치료는 기본적으로 회개로부터 출발한다. 자신이 그려온 지도가 엉터리라는 것을 인정하고 자기 지도를 수정하기로 방향전환을 하는 것이 회개이다. 세계관의 변화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사단은 기도하지 않고 ‘인간의 말’로 전도하는 것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껍데기는 바꾸어도 알맹이는 바꾸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단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로 무장하고 성령에 힘입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 때 반드시 사단의 저항을 받게 된다. 세계관의 대결은 단순히 기독교와 타종교와의 대결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경적 세계관과 비성경적 세계관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관의 싸움은 그리스도인 내부에서 먼저 일어나야 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바알 신앙을 계속해서 훼파하고 여호와 신앙을 구축해야 한다.